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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mAkaRios Wordpres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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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마카리오스 워드프레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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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몇 사람을 위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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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1 Jul 2010 00:46:07 +0000</pubDate>
		<dc:creator>makarios</dc:creator>
				<category><![CDATA[나의 강단]]></category>
		<category><![CDATA[나의 신앙 나의 교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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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60;
계 3:1~6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3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160;</p>
<p>계 3:1~6</p>
<blockquote><p>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br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br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br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br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br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p>
</blockquote>
<p>&#160;</p>
<h3>이름만 살은 교회 ::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h3>
<p>비전이 옳다고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모임에 가입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과 양심을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판단하시는데, 오늘 사데 교회를 향한 말씀에는 그 기분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p>
<p>그것은 ‘네 행위’입니다. 이상 중요합니다. 비전이 건강해야 합니다. 어떤 교단에 가입하고, 어떤 교리를 추구하느냐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은 될 수 없습니다.</p>
<p>이번에 기독교비판의 책이 하나 출간되었는데, 그 소제목 중의 하나가 ‘한국에서는 그리스도와 예수가 서로 경쟁하고 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고 보니, 역시 교파 문제를 짚은 것입니다. </p>
<p>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는데, 한편은 예수교 장로회라 하고, 다른 한 편은 기독교 장로회라고 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심지어 싸우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p>
<p>물론 바깥에서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p>
<p>그러나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우리가 결코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무시할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p>
<p>저는 장로교 신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p>
<p>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제주도에 가셔서 사시게 되었는데, 교회를 찾다가 마땅한 장로교회가 주변에 없어서 감리교회를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도 좋고, 성도들도 친절해서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p>
<p>그런데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감리교에서 유명한 부흥사가 오셨는데, 설교 시간마다 장로교회를 비판하고 조롱했다고 합니다.</p>
<p>그분은 아마도 거기 앉아서 설교를 들으시는 저의 어머니 아들이 장로교 목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합니다.</p>
<p>무엇을 믿느냐 중요합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모두 각자의 색깔이 있습니다. </p>
<p>그러나 우리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한 예수님을 주님이라 시인하며,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의 성경으로 예배를 드립니다.</p>
<p>다시 말해서 차이가 공통점을 압도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우리는 그것을 교파라고 하지 않고 이단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p>
<p>평화, 화해, 일치의 복음을 가지고서도 경쟁, 시기, 분열의 길을 걷는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p>
<p>저는 이것이야말로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에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p>
<p>이름만 보수이고, 성경주의이고, 정통이면 뭐 합니까?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행위를 보십니다. 우리가 정말 성경의 진리들을 실천하는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고 있는지 살피십니다.</p>
<p>분명히 말합니다. 동경드림교회만 교회고, 동경드림교회에 다녀야만 복을 받고, 동경드림교회 이외에는 모두 부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 가시겠다는 분들에 대하여 저는 언제든지 축복하며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p>
<p>요즘같이 경쟁의 시대에 목사가 너무 무르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무르다는 소리보다, 성경에 불순종하는 것을 더 두렵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p>
<p>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아십니다. 어디에서 신앙생활을 하든지 신실하게 하십시오. 대강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연결되고 하나입니다. </p>
<h3>사람을 귀히 여기라 :: 죽게 된 것(사람)을 굳건하게 하라.</h3>
<p>잘못된 신앙의 폐해는 그대로 거기 속한 사람들의 몫이 됩니다.</p>
<p>순종 없는 신앙생활로 이름뿐인 교회를 이루고 보니, 거기에서 사람들의 신앙이 생기 있게 살아날 리가 없습니다. </p>
<p>주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조직이 아닙니다. 선교대회가 아닙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연보는 더더욱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이며, 주님의 관심도 항상 사람입니다.</p>
<p>죽은 교회라고 하셨지만,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그들을 부흥하게 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시고 있습니다.</p>
<p>우리는 여기서, 야고보서의 관점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p>
<p>야고보서는 행위가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네 행위를 아는데, 너는 죽은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절 마지막에도,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겠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행위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p>
<p>결국 살아있는 신앙은 행위가 있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행위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적극적 순종을 의미합니다.</p>
<p>말이 변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거룩한 부담감을 전혀 가지지 못하고 자기 집 안방에서나 사용할 어휘들을 함부로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이고, 우리는 사교모임이 아니라 거룩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p>
<p>나이가 어려도 존중해야 합니다. 말을 놓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상대가 존중 받는 느낌을 가지도록 톤과 목소리, 느낌을 동원하여 온유하게 말해야 합니다. </p>
<p>왜 이렇게 말 하나에까지 조심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p>
<p>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예민한 사람도 있고, 무감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p>
<p>무감각한 사람에게는 조금 무례해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민한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상처 받고, 실족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 아이의 눈 높이에 맞추는 것처럼, 교회는 씩씩하고 튼튼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 어린 사람, 부족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p>
<p>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p>
<p>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p>
<p>롬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p>
<p>사람을 죽게 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입니다. 나쁜 이라는 말과 교회라는 말이 불합리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그렇게 사용해 봅니다. 그렇다면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p>
<p>죽게 된 사람도 살리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p>
<h3>몇 사람을 위하여 ::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h3>
<p>사데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p>
<p>이름만 교회이지 교회의 구실을 못해서 주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빨리 그 행위를 고치라고 하십니다. </p>
<p>이러한 회복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까? </p>
<p>2절과 3절에 ‘일깨다’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어나 (잠을) 깨다’는 의미입니다. </p>
<p>이 말씀을 주의해야 합니다. </p>
<p>사데교회가 이런 현실에 처한 것에는 그들이 꿈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꿈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p>
<p>목회를 하면서 놀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행실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조차 남을 판단하는 경우에는 아주 반듯한 말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p>
<p>우리 솔직해집시다. 다른 사람의 신앙과 행위를 판단할 때에는 우리가 얼마나 반듯한 잣대를 대고 의롭게 말을 합니까? 문제는 그 똑같은 잣대로 자기를 반성하고 개혁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는 것에 있습니다.</p>
<p>주님의 말씀과 같이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다.</p>
<p>이것이 바로 꿈속과 같은 신앙생활의 정체입니다. 자기 의로움, 자기 확신, 자기 지식에 빠진 신자들은 기도에 대하여 설교 듣는 것을 기도생활로 착각하고,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 성경을 묵상하지 않아도 되는 줄로 알며, 가수들의 찬양을 듣는 것으로 자기의 경배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p>
<p>그러면서도 자신이 건강하며, 제대로 믿고 있다고 착각합니다.</p>
<p>아닙니다. 꿈에서 깨어야 합니다. </p>
<p>하나님이 듣기를 원하시는 것은 MP3의 찬양이 아니라 여러분의 목소리입니다. 여러분의 눈물과 감정이 배인, 조금은 어눌하고 투박한 그 목소리입니다. </p>
<p>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정현 목사의 설교방송이 아니라, 여러분이 성경 앞에 단정하게 앉아서 직접 그분의 목소리에 날마다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p>
<p>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기도에 대한 논리와 지식이 아니라, 날마다 방석을 눈물과 땀으로 적시는 실제적인 기도입니다. </p>
<p>이것 없이 스스로 착각하는 동안, 우리의 신앙은 고사되고, 교회는 죽어가는 것입니다.</p>
<p>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사데 교회는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p>
<p>주님은 4절에서 그들을 칭찬하시고 인정하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에 어울리는 사람들입니다. </p>
<p>결국 사데교회에 이 메시지가 주어진 것,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은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p>
<p>죽은 화분에는 더 이상 물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구석에서 파릇한 새싹이 돋아날 때에, 주인은 희망을 품고 정성을 기울여 돌보게 됩니다.</p>
<p>사데교회에는 희망의 싹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지식을 신앙으로 여기는 꿈과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라, 소박한 현실에서도 말씀과 씨름하며 하나님 앞에 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소수의 몇 사람이었습니다.</p>
<p>그들이 극히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사데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에는, 그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천명되어 있습니다. </p>
<p>그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p>
<p>그리고 그들을 통해 마지막 승리를 얻게 하시고, 영원한 하늘의 생명과 천사들 앞에서의 명예를 얻게 하실 것입니다.</p>
<p>참된 믿음을 소중히 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신앙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있습니까?</p>
<p>이 말씀을 전하고 격려하십시오. 그들의 신앙생활이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그 진심을 아신다는 것을 말해 주십시오.</p>
<p>여러분도, 그분들도 마지막 승리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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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용서, 위대한 선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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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1 Jul 2010 00:44:4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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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사람이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피조물로 사람을 지으셨고, 그에게 영광을 더하시기 위하여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라는 값진 선물을 그만 타락하는 일에 사용하고 말았다. 이 선택의 결과로 사람은 죄가 주는 불행과 싸우는 길고 고된 시간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중심으로 인간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신학에서는 ‘구속사’라고 한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사람이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br />하나님은 최고의 피조물로 사람을 지으셨고, 그에게 영광을 더하시기 위하여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라는 값진 선물을 그만 타락하는 일에 사용하고 말았다. 이 선택의 결과로 사람은 죄가 주는 불행과 싸우는 길고 고된 시간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br />하나님의 구원을 중심으로 인간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신학에서는 ‘구속사’라고 한다.    <br />‘구속(救贖)’이라는 것은 죄를 용서하여 구원한다는 의미이니, 결국 구원의 역사는 용서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br />자유를 타락에 사용한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처럼 긴 역사의 시간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처절한 희생을 하신 것도 역시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br />용서는 아프다. 아픔이 없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br />용서는 간단하게 되는 법이 없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사랑의 마음을 위협하는 자기 안의 질문들과 싸우지 않고 간단하게 용서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br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을 통해 잃어버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용서이기 때문이다.    <br />죄가 사람 안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들을 파괴한다.    <br />죄와 하나님은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죽고, 하나님이 살면 우리 안에 죄가 죽는다. 그래서 죄는 필사적이다.    <br />특별히 죄는 용서를 파괴한다. 원한을 오래 품고, 더 열렬하게 미워할수록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용서하는 마음은, 죄를 무력하게 한다.    <br />당장은 분노하거나 미워할 수 있어도, 용서하면 그것이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망가뜨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br />예수님은 용서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사 마지막으로 하셨던 기도 역시 용서의 중보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자기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용서하시고 다시 제자로 세우셨다.    <br />결국 용서 없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본받을 수도 없다.    <br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운명적이다.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다. 용서하지 않을 수 없어 용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덜 위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스스로 하든지, 타의로 하든지 어렵고 힘든 선택이기 때문이다.    <br />그만 용서하라. 이유를 달지 말고, 그냥 용서하라.    <br />당신에게 용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고 싶어하신다는 뜻이다. 샬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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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탓, 그 자기 함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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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사람은 하나님께 창의적인 능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 능력이 좋은 일에 사용될 때에 사람의 가치는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이기심과 욕망을 위해 발휘되면 사람은 가장 절망적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더욱 나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는 것에 이 창의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합리화, 핑계, 변명, 탓 등으로 불려지는 이러한 성향은 불편하게도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사람은 하나님께 창의적인 능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br />그 능력이 좋은 일에 사용될 때에 사람의 가치는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이기심과 욕망을 위해 발휘되면 사람은 가장 절망적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br />더욱 나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는 것에 이 창의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br />합리화, 핑계, 변명, 탓 등으로 불려지는 이러한 성향은 불편하게도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br />저는 두 아들의 모습에서 저를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br />두 살 차이의 남자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둘은 대립과 갈등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br />그렇다고 둘의 사이가 특별히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마다 둘이 사이 좋게 학교에 등교하는 모습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중에 하나입니다.    <br />그렇게 소중한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불거지면, 둘은 서로를 탓합니다.    <br />언제나 자기의 반성은 없고 상대방이 문제를 유발했다고 고발합니다.    <br />그러나 더욱 강력하게 고발하면 고발할수록 그것은 본인들의 인상을 나쁘게 합니다. 왜냐하면 고발을 듣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런 태도들이 아주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br />오히려 자기를 반성하고 상대를 덮어주려 한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중재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자기가 옳다고만 하니 얄미운 마음도 듭니다.    <br />두 아들을 통해 저는, 남의 탓을 하며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미련한 태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br />사람은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br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모두 부족한 자녀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지 않고 자비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자기를 반성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실수들을 관용해 주실 것입니다.    <br />그리스도인은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br />사람 탓, 환경 탓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br />특별히 다른 사람이 나쁘게 행동한다고 하여서 은밀한 방식으로 보복하는 것, 혹은 똑같은 방법으로 응대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인의 얼굴인 것입니다.    <br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소용 없습니다.    <br />하나님 앞에서 미움과 분노를 정당하게 해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br />사람은 설득하여 자기의 편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런 사람의 편이 되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잘못에도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안아 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br />정의 보다 큰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샬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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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난하지만 부요한 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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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3 Jun 2010 11:20:4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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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요한계시록 2:8~11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요한계시록 2:8~11</p>
<blockquote><p>(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br />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br />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br />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p></blockquote>
<p>서머나는 터키에 있습니다.</p>
<p>지금은 ‘이즈미르’라고 불려지며, 터키의 3대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p>
<p>일찍이 상업이 발달하여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도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황제를 향한 충성심이 남달리 강해서 황제성전이 제일 먼저 세워졌던 도시이기도 합니다.</p>
<p>유명한 음유시인 호머의 고향이며, 에게해의 진주, 아시아의 사랑, 아시아의 면류관이라고 불려졌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입니다.</p>
<p>그러나 이 도시에서 교회는 가난했습니다.</p>
<p>주님께서는 9절에서 서머나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이해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p>
<p>교회에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만 나왔던 것일까요?</p>
<p>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의 본문에 드러나는 것과 같이 환난이 궁핍의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이해됩니다.</p>
<p>서머나가 항구도시로 알렉산더 대왕의 시절부터 이미 상업이 발달하면서, 이곳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습니다. 또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마의 시대에는 황제를 향한 남다른 충성심으로 가장 먼저 황제신전이 세워졌던 곳이었습니다.</p>
<p>덕분에 교회는 양편의 핍박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p>
<p>유대인들은 서머나교회를 변절자로 낙인 찍어 핍박하였고,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만 섬기라’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예수를 왕으로 고백하는 교회적 신앙이 핍박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p>
<p>결국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서머나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냉대와 손해를 감수해야 했던 것입니다.</p>
<p>이러한 환난이 짧지 않게 계속되었기 때문에, 서머나교회의 교인들은 가난하게 되었고, 그 어려움이 많았던 것입니다.</p>
<p>주님은 9절에서 이러한 서머나교회를 향하여, 실상은 너희가 참 부요한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p>
<p>그것은 서머나교회가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믿음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p>
<p>지구상의 모든 곳을 살피시는 주님의 눈길 앞에서, 이 소박한 교회는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요, 주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교회였던 것입니다.</p>
<p>그들의 신앙적 부유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화가 있습니다.</p>
<p>계시록을 기록했던 사도요한의 제자로 폴리갑이라는 분이 있습니다.</p>
<p>이 분이 서머나교회의 감독, 그러니까 오늘날의 목사로 교회를 섬겼습니다.</p>
<p>그런데 서머나교회에도 로마 황제의 기독교 핍박이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서머나의 총독은 폴리갑을 체포했고, 그에게 화형을 언도했습니다. 그의 나이 86세였습니다.</p>
<p>폴리갑은 자기를 체포하려고 왔던 병사들을 집안으로 맞아 정성껏 대접하고, 그들을 위하여 축복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끌려가 화형을 기다렸습니다.</p>
<p>화형이 거행되기 직전에 총독은 황제의 이름을 빌어 자비를 제안했습니다. 만약 폴리갑이 지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버리고 로마의 황제를 ‘주님’과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를 풀어줄 수도 있다는 제안이었습니다.</p>
<p>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p>
<p>&#8220;나는 86년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고, 주님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왕이시요,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겠는가?&#8221;</p>
<p>그는 스스로 화형의 장작더미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화형을 집행하는 형리에게 외칩니다.</p>
<p>&#8220;그대들은 한 시간 가량 사르고 없어질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여 장차올 심판의 불을 모르는가? 왜이리 지체하고 있느냐 어서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라&#8221;</p>
<p>결국 폴리갑은 찬송을 부르며 순교했습니다.</p>
<p>폴리갑의 죽음은 신자들에게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주었고, 교회를 단단하게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p>
<p>이러한 서머나교회의 핍박을 이미 아셨던 주님이기에 10절에서 예수님은 서머나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p>
<p>(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p>
<p>그렇습니다.</p>
<p>서머나교회는 가난하지만 부요한 교회입니다.</p>
<p>그것은 그들이 신앙을 위하여 세상의 부요함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며,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p>
<p>보통 사람도 이러한 믿음을 받는다면 거기에 합당한 신의를 지키려고 할 터인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이런 교회를 어찌 실망시키실 수 있겠습니까?</p>
<p>오늘날에는 불행하게도 이 서머나교회의 부흥이 추억으로만 남아 있습니다.</p>
<p>터키는 현재 국민의 98%가 이슬람을 믿는 나라입니다.</p>
<p>이즈미르에는 서머나교회를 기념하는 교회가 지금도 세워져 있지만, 그 모습은 작고 보잘것없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적습니다.</p>
<p>그러나 그들의 과거에 이렇게 빛나는 교회가 서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p>
<p>서머나교회의 신앙은, 이 성경의 말씀과 함께 지금도 살아서 수많은 교회들, 가난하지만 부요한 교회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p>
<p>8절에서 주님은, 서머나교회를 향하여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p>
<p>(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p>
<p>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악한 자들의 손에 죽으셨습니다.</p>
<p>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불의했던 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사형은 인간이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준엄한 형벌이며, 인간으로서의 모든 희망이 끝나는 자리입니다.</p>
<p>그러나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p>
<p>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영광을 교회에 보이시고, 하늘에 오르사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p>
<p>주님은 서머나교회를 향하여 이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p>
<p>내가 어떻게 교회의 머리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만물의 주가 되었는지 다시 마음속에 새겨 보라는 것입니다.</p>
<p>복음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둘 혹은 셋 중에서 가장 좋게 생각되는 것을 선택합니다.</p>
<p>시장에서 과일을 살 때에도, 비슷하게 생긴 과일들 중에서 조금 더 크고, 신선하고, 맛있게 보이는 것을 선택하려고 망설입니다.</p>
<p>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 대한 선택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 신중해야 하겠습니까?</p>
<p>만약 우리의 눈에 예수님의 말씀과 약속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하늘나라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을 포기하고 손해를 감수할 수 있겠습니까?</p>
<p>결국 우리가 서머나교회와 같이 가난하지만 부요한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p>
<p>우리 눈에 아직도 세상은 좋아 보이고, 성경의 약속과 하늘나라와 복음적 삶은 초라하고, 보잘것없게 보이는 것입니다.</p>
<p>일본에 와서 보니, 휴일이 참 많습니다.</p>
<p>일본도 열심히 일하는 나라이고, 한국도 그러합니다. 아마도 퇴근 시간 이후에도 추가 임금 없이 서비스로 일하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p>
<p>물론 한국은 먹는 것은 잘 챙기는 편입니다. 늦게 일하게 되면 꼭 같이 저녁을 먹고 일하지 일본처럼 밤 10시, 11시까지 저녁식사도 없이 일하지는 않습니다.</p>
<p>그러나 반대로 일본이 한국보다는 휴일이 많습니다. 주5일 근무제도 훨씬 잘 정착되었고, 연휴도 많아서 좀 더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p>
<p>하지만 노동시간과 여건은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더 편하다는 사람도 있고, 한국이 더 편하다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것이고, 전체적으로 보면 많이 비슷한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p>
<p>그런데 한국의 교회와 일본의 교회는 느낌이 아주 다릅니다.</p>
<p>심지어 일본인 교회뿐 아니라, 일본의 한국인 교회도 한국과는 느낌이 다릅니다.</p>
<p>여러분은 이곳에서 ‘아웃리치’라는 것을 겪어 왔습니다.</p>
<p>아웃리치는 평신도의 단기선교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직장인이며, 학생들인데, 선교지의 교회를 돕기 위하여 자비량으로 외국에 가서 일주일 정도를 머물면서 현지의 교회를 돕고, 물질을 후원하는 것입니다.</p>
<p>한국에서 일본에 오는 것이 환율이 좋아고 할 때도, 10배였습니다.</p>
<p>결국 그 일주일에 그들은 보통 200~300만원 정도를 투자하게 됩니다. 또한 많지 않은 연휴와 휴가를 모두 사용하게 됩니다.</p>
<p>이것은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내어 한국의 자기 집에 다녀오려고 하는 분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p>
<p>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p>
<p>그 돈이면 필리핀, 태국, 혹은 중국과 같은 곳에서 고급 투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제법 재미있고 호사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올 수 있는 시간과 돈입니다.</p>
<p>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선교를 위하여 투자합니다.</p>
<p>물론 선교와 관광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눈살을 찌프리게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헌신을 그렇게 폄하하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p>
<p>정말 한 번도 외국여행 못해본 분들이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으로 선교하기 위해, 전도하기 위해 헌신하는 경우들을 겪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p>
<p>반대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비용을 투자하여서 알지도 못하는 교회를 돕기 위하여 이국 땅에 갈 의향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여러분의 황금 같은 휴가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p>
<p>한국교회가 강한 것은, 모든 교회가 성도가 많고 부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p>
<p>한국교회에는 이렇게 자기를 헌신하는 신자들, 서머나교회의 신자들과 같이 믿음을 위해 기꺼이 가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입니다.</p>
<p>교회의 진정한 저력과 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p>
<p>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치를 선택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영원한 것으로 보상하여 주신다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축복의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합니다.</p>
<p>포기하는 시늉이 아니라, 정말 포기해야 합니다.</p>
<p>편하고 싶고, 부요 하고 싶고, 유명하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부요함이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p>
<p>서머나교회가 부요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p>
<p>그들은 돈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것을 위해 기도할 사람들이 있었고, 주님을 위해 순교할 목회자가 있었고, 불 같은 시련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정금과 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p>
<p>우리는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p>
<p>예배당을 짓고 숫자를 자랑하는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p>
<p>주님이 보시기에 그런 것은 물거품과 같습니다.</p>
<p>우리는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적인 부요함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머나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p>
<p>저와 여러분이 이 목적을 향해 계속 기도하며 함께 동행하기를 원합니다.</p>
<p>아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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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다 내게로 오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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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2 Jun 2010 09:17:43 +0000</pubDate>
		<dc:creator>makarios</dc:creator>
				<category><![CDATA[나의 강단]]></category>
		<category><![CDATA[나의 신앙 나의 교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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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마태복음 11:25~30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마태복음 11:25~30</p>
<blockquote><p>(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br />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br />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br />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br />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br />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p></blockquote>
<p>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서 제자도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p>
<p>마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의 여러 고을로 흩어져 전도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p>
<p>우선 이 말씀을 통해 한 가지 수정할 것이 있습니다.</p>
<p>신앙생활은 강제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누구도 강제하지 못합니다.</p>
<p>창조주 하나님께서만 강제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사람의 믿음을 강제하시지 않습니다.</p>
<p>만약 하나님께서 강제로 자기만 섬기도록 하셨다면 우리는 이렇게 많은 혼란을 겪고, 우상들에 둘러싸여 살아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을 지극하게 존중하신 것입니다.</p>
<p>결국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강제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누군가의 자유를 구속하고 강제로 믿게 한다면 그것은 결코 합당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p>
<p>그래서 성경은 모든 ‘압제’를 부정합니다.</p>
<p>근대의 세계사에서 기독교가 제국의 침략과 인권의 유린에 일조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국이 서부개척을 하면서 인디언들을 핍박할 때에,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릴 때에, 유럽의 열강들이 동남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할 때에, 기독교는 그것을 옹호하고 협력하였던 과거가 있습니다.</p>
<p>이유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미전도 지역을 미개지역으로 보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정복지로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역사로 인하여, 동남아에서는 아직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큰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p>
<p>우리는 역사를 통해 반성하고, 그 토대 위에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p>
<p>이러한 역사는, 우리가 복음을 누군가에게 강제하는 것이 매우 비효과적이며, 또한 많은 부조리들을 만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잘 되새겨서, 보다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인내를 바탕으로 하는 전도의 방법들을 배워야 합니다.</p>
<p>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전도의 거룩한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태복음 11장에서 다시 확인합니다. 무례하고 강제적인 전도의 방식들을 경계하더라도, 제자들은 계속해서 세상을 향하여 나가야 하며, 복음을 전해야 하고, 믿는 자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p>
<p>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전도를 위하여 나름 노력해 왔습니다.</p>
<p>그러나 대부분의 시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한 것도 사실입니다.</p>
<p>우리는 고민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전도가 잘 되는 방식들, 혹은 이전의 경험에서 효과를 보았던 방식들을 따를 것인가?</p>
<p>그러나 어떤 방식들은 전혀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원리와 부합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p>
<p>만약 우리가 결과만 중시한다면 보다 운신의 폭이 넓을 것입니다.</p>
<p>그러나 교회는 결코 결과만을 위해 달려가는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우기를 원하는 교회는, 무조건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의 원리가 바로 선 교회, 그래서 그 원리를 따라서 부흥하는 교회입니다.</p>
<p>과연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 인생을 걸고 실험해야 합니다.</p>
<p>그래서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들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패배감이 아니라 고민과 도전으로 다시 용감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p>
<p>다시 말해서, 전도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포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속적으로 힘써야 하는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p>
<p>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느슨해진 부분들, 복음을 전하는 것에 소극적이 되어버린 생각들을 다시 정리하고 열심을 새롭게 회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p>
<p>마태복음의 11장을 읽어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흩어져 전도했던 결과가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절에서 24절은 오히려 전도가 실패했던 도시와 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p>
<p>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에서의 전도는 실패했습니다.</p>
<p>20절의 말씀에 의하면, 이 성들에서 오히려 더 많은 권능을 행하셨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불신앙은 극복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발길을 돌리셨고, 이제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불신앙과 결말에 대하여 탄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p>
<p>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전도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하는 것이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p>
<p>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 선택을 존중하십니다.</p>
<p>우리가 믿음을 통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과, 불신앙을 통해 복음을 거절하고 멸망에 이르는 것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선택입니다. 다만 그 기회를 바르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p>
<p>그러므로 전도자의 1차적 책임은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p>
<p>일본에서 사역하시는 한 한국인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p>
<p>이 선교사님의 요청으로 한국의 선교단체에서 훈련된 청년들이 단기선교를 오게 되었습니다.</p>
<p>청년들은 일본어 사영리 등을 준비하고, 간단하게라도 일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훈련을 열심히 받아서 이곳에 파송 되었습니다.</p>
<p>그런데 도착하니, 선교사님은 전도지 10만장을 준비하고, 그 지역의 모든 집들에 전도지를 넣어줄 것을 원했습니다. 청년들은 일단 현지의 선교사님에게 무조건 복종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에 묵묵히 그 일에 착수했습니다.</p>
<p>그러나 무더운 일본의 여름날에 골목골목을 누비며 하루 종일 집집마다 빠지지 않고 전도지를 넣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p>
<p>저녁이 되어 교회로 돌아온 청년들은 반성회를 통해 불만을 가득 쏟아내게 되었습니다.</p>
<p>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은 전도지(찌라시)를 돌리는 것 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붙들어서 사영리를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것이 아니냐고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선교사님에게 감히 말할 수 없어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억지로 그 일을 했습니다.</p>
<p>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날에 전도지 10만장을 모두 돌리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p>
<p>그 때, 선교사님은 털썩 강단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p>
<p>“하나님, 이제 이곳의 10만명은 더 이상 내 책임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한 번이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저의 소원이었는데, 오늘 이 청년들을 통해 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10만명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해도 그 피 값을 저에게 찾으실 수 없습니다……”</p>
<p>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본에서 사역하며, 얼마나 선교사님의 마음에 복음을 전하는 부담감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의 기도를 들으며 청년들도 울기 시작했고, 같이 엎드려 하나님 앞에 일본의 선교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p>
<p>다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결과가 아닙니다.</p>
<p>물론 그 전도지 10만장이 사람이 보기에는 매우 불합리하고 비효과적인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그 본심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진심을 통해 불신앙의 땅에 하나님의 부흥이 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p>
<p>우리가 원하는 것이 결과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전도할 때마다 충분한 결과를 얻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평가로는 예수님의 전도에도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p>
<p>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미션완수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지만, 결과가 없다면 그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p>
<p>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용감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p>
<p>한국에서 전도를 잘하시는 분으로 김기동 집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p>
<p>이분의 별명이 고구마 전도왕입니다. 이분은 전도를 고구마 찌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p>
<p>솥에 찜기를 넣고 물을 부어 고구마를 찝니다. 물이 끓어서 수증기가 뜨거워지면 고구마를 표면부터 익혀가게 됩니다. 그러나 단단한 고구마가 금새 익을 리가 없습니다.</p>
<p>그래서 겉으로는 익은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속은 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찔러보면 됩니다.</p>
<p>들어가다가 딱딱하게 걸리면 아직 익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젓가락은 쑤욱~ 들어가서 고구마를 관통하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잘 익은 것이니 꺼내 먹으면 됩니다.</p>
<p>전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안 오려는 사람을 강제로 오게 할 것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되도록 자주 교회 가자고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p>
<p>그러면 하나님께서 익혀 놓으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 저런 사정으로 인하여 고민하던 사람이 내 전도를 받는 순간 마음이 움직여서 교회에 나오게 되는데, 이런 전도는 하나도 억지스럽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p>
<p>솔직히 우리는 비겁할 때가 많습니다.</p>
<p>누군가를 강제하거나, 무례하게 여겨지는 것이 싫다고 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은 범주 안에서도 얼마든지 전도할 기회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용기와 실천입니다.</p>
<p>우리는 때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이런저런 핑계들로 자신의 전도하지 않는 삶을 변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하려고 좀 더 자주, 좀 더 넓게 말하는 것을 노력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말입니다.</p>
<p>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도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p>
<p>마지막으로, 25~30절을 보겠습니다.<br />
11장의 말미에 있는 본문, 25절에서 30절을 지금까지 살폈던 문맥 속에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요절과는 다른 느낌으로 이해하게 됩니다.</p>
<p>우리는 지금까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자기 삶에 지친 사람들이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때문에 이 말씀이 일상 속에서 지친 우리들에게 늘 위로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p>
<p>그렇구나. 예수님은 회사 생활에 지치고, 가사노동에 지친 우리들에게 쉼을 주시고자 하시는구나. 나도 그런 쉼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요절을 읽을 때가 많았습니다.</p>
<p>그러나 마태복음 11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향한 교훈입니다.</p>
<p>그리고 이 본문은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전도의 실패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p>
<p>물론 28절의 초청이 어떤 제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모두’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두 팔을 넓게 벌린 아버지처럼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p>
<p>그러나 26절~27절을 읽어 보십시오.</p>
<p>(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p>
<p>(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p>
<p>이미 예수님은 이러한 초청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p>
<p>결국 이 말씀의 초청에 합당한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p>
<p>그리고 지금, 그들의 수고와 무거운 짐은, 삶의 무게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파송과 사역, 거절과 열매 없음으로 인한 상한 마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습니다.</p>
<p>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의 쉼과 안식까지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참 거북한 현실입니다. 교회와 함께 고난을 받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일은 거절하면서 마치 취미생활과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골라 하고, 그러면서도 육신적인 자신의 삶에서 오는 피곤함에 대하여 주님이 위로를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분별력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p>
<p>그러나 본문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초청이 아닙니다.</p>
<p>본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위로입니다. 이 사실은 마지막 30절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멍에와 자신의 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과도 잘 조화를 이룹니다.</p>
<p>결국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의 짐을 같이 지려는 사람들이 이 위로를 받아야지,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 안간힘을 하던 사람들이 이 위로를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p>
<p>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쉼이 있습니다.</p>
<p>그것은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변하는 것에서 생겨납니다.</p>
<p>온유와 겸손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울 때에,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평강과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p>
<p>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옵니까?</p>
<p>느슨하고 쉽게 살아가는 삶에서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이런 내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p>
<p>복음을 위해 찾아가고, 수고하고, 거절 당하고, 상처 받아야 합니다.</p>
<p>신기한 것은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을 결코 깨어지도록 주님께서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p>
<p>예수님은 교회와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시고 돌봐 주십니다.</p>
<p>저는 여러분이 이 위로와 쉼을 경험케 되기를 바랍니다.</p>
<p>좋습니다. 교회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백 번 양보해서 그런 것이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에 과연 다른 것들 것 얼마나 열정을 나타내고 있습니까?</p>
<p>성경을 사랑하십니까? 열렬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습니까? 여유가 생길 때마다 입술에서 찬양이 흐르고 있습니까?</p>
<p>이런 삶을 산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위로를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p>
<p>그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위로를 경험한다면,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고 자질구레한 일들까지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갈 것입니다.</p>
<p>당신은 누구입니까?</p>
<p>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자신의 삶을 자기 주장대로 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충성하고 있습니까?</p>
<p>그런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p>
<p>사람들은 당신의 사역을 훼방하고, 당신의 복음과 꿈을 조롱하고, 당신에게 많은 상처를 만들어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에 기뻐하십시오.</p>
<p>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로부터 호응과 칭찬을 들었던 시기는 역사 속에서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매를 맞고, 욕을 먹고, 옥에 갇히고, 배신을 당했습니다.</p>
<p>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런 사역자들을 배신하지 않으셨습니다.</p>
<p>그분은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죽고자 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p>
<p>아무도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와 친절을 빼앗을 수 없었으며, 모진 세월과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그들의 입술은 나지막하게 감사의 찬양을 불러 왔습니다.</p>
<p>예수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 하십니다.</p>
<p>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져야 했던 사람들아, 다 내게로 와라.</p>
<p>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의 마음에 온유와 겸손을 가르치고, 어떻게 하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를 알게 하리라. 나는 결코 억지로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나는 갈보리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결코 독해지거나, 악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도 어떻게 상황을 이기고 승리하는지 가르쳐줄 수 있다. 나는 너희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과 쉼이 충만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내가 그 일을 할 것이다……</p>
<p>이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p>
<p>샬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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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에겐 과거의 분별력이 필요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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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0 Jun 2010 01:39:24 +0000</pubDate>
		<dc:creator>makarios</dc:creator>
				<category><![CDATA[나의 신앙 나의 교회]]></category>
		<category><![CDATA[목양칼럼]]></category>
		<category><![CDATA[기념]]></category>
		<category><![CDATA[러시모어]]></category>
		<category><![CDATA[미국]]></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category><![CDATA[지올코브스키]]></category>
		<category><![CDATA[타슈카 위코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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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러시모어(Rushmore)에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을 조각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조각가 지올코브스키(Korezak Ziolkowski)는 한 수우족 추장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에게도 영웅이 있었음을 알아달라는 간략한 편지였다.
타슈카 위트코. 수우족의 말로 미친 말(Crazy Horse)라고 불려졌던 추장.
인디언을 그 땅에서 몰아내는 전쟁이 치열했던 시절, 미국의 제7기병대를 대파하고 존 커스터 장군을 전사하게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35살의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지올코브스키는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wp.tokyodream.org/wp-content/uploads/2010/06/capture5.jpg"><img class="alignnone size-medium wp-image-752" title="capture5" src="http://wp.tokyodream.org/wp-content/uploads/2010/06/capture5-300x193.jpg" alt="타슈카 위코트" width="300" height="193" /></a></p>
<p>러시모어(Rushmore)에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을 조각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조각가 지올코브스키(Korezak Ziolkowski)는 한 수우족 추장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에게도 영웅이 있었음을 알아달라는 간략한 편지였다.</p>
<p>타슈카 위트코. 수우족의 말로 미친 말(Crazy Horse)라고 불려졌던 추장.</p>
<p>인디언을 그 땅에서 몰아내는 전쟁이 치열했던 시절, 미국의 제7기병대를 대파하고 존 커스터 장군을 전사하게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35살의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p>
<p>지올코브스키는 1949년부터 휴대용 착암기를 하나 들고, 러시모어에서 27Km 떨어진 곳에 이 타슈카 위트코의 얼굴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인디언 말살의 역사를 사죄하는 의미로, 미국의 연방정부는 1천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지올코브스키는 거절했다.</p>
<p>오로지 기부금과 관광수입으로 그는 이 외로운 일을 계속해 나갔다.</p>
<p>그리고 35년이 지난 1982년, 지올코브스키는 혼자서 750만톤의 돌을 깨고 숨을 거두었다.</p>
<p>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그의 아내와 10명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 받은 것이다.</p>
<p>드디어 1998년, 타슈카 위트코의 얼굴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말을 조각하는 작업이 계속 진행중이다. 높이 171m, 길이 201m로 예정된 타슈카 위트코의 조각상은 완성되기까지 앞으로도 100년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p>
<p>묘하게도 러시모어의 위대한 대통령들을 이 타슈카 위코트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p>
<p>마치 오늘날의 미국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기억하라는 듯이.</p>
<p>지올코브스키는 말했다.</p>
<p>“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려면 우리에겐 과거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p>
<p>많은 사람들이 아픈 과거를 따지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붙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p>
<p>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과거를 제대로 기념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미래에도 과거의 실수가 그대로 재현되고, 정말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붙잡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일이 생겨난다.</p>
<p>타슈카 위트코는 증인이다. 미국이 서부개척의 시대에 인권을 짓밟고 유색인종을 차별했던 것, 심지어 말살하려 했던 것에 대하여 엄중하게 항의하는 증인이다.</p>
<p>더불어 앞으로는 결코 어떤 사람과 민족을 향해서도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고,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살인의 역사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경고이다.</p>
<p>타슈카 위트코를 오늘날에 다시 불러낸 지올코브스키의 삶도 참 감동적이다.<br />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인류는 위대한 것이 아닐까?<br />
과연 사람에게는 위대한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 있다… 샬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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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열정이 테크닉보다 중요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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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5 Jun 2010 17:56:30 +0000</pubDate>
		<dc:creator>makarios</dc:creator>
				<category><![CDATA[나의 궁시렁]]></category>
		<category><![CDATA[살며 생각하며]]></category>
		<category><![CDATA[디자인]]></category>
		<category><![CDATA[열정]]></category>
		<category><![CDATA[테크닉]]></category>
		<category><![CDATA[학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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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포드의 글로벌 디자인 헤드(총괄)인 제이 메이(50·사진) 부사장
자동차 디자이너로 성공하려면     좋은 미술 대학을 나와 디자인 테크닉을 키우는 것보다는      자동차를 좋아하는 열정이 중요하다.
(2010-01-11, 디트로이트 모터쇼)

그는 자동차 업계의 디자인 헤드 가운데 드문 미국인(오클라호마 태생)이다. 
캘리포니아 아트 센터를 졸업하고 1980년 아우디에 입사해 97년 포드로 옮기기 전까지 폴크스바겐·BMW 등 독일 업체에서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border="0" alt="" src="http://thoth.tokyodream.org/files/attach/images/229481/848/269/003/wpdlapdl.JPG" width="250" height="151" /></p>
<p>포드의 글로벌 디자인 헤드(총괄)인 제이 메이(50·사진) 부사장</p>
<blockquote><p>자동차 디자이너로 성공하려면     <br />좋은 미술 대학을 나와 디자인 테크닉을 키우는 것보다는      <br />자동차를 좋아하는 열정이 중요하다.</p>
<p>(2010-01-11, 디트로이트 모터쇼)</p>
</blockquote>
<p>그는 자동차 업계의 디자인 헤드 가운데 드문 미국인(오클라호마 태생)이다. </p>
<p>캘리포니아 아트 센터를 졸업하고 1980년 아우디에 입사해 97년 포드로 옮기기 전까지 폴크스바겐·BMW 등 독일 업체에서 외관 디자인을 담당했다. </p>
<p>이런 경력으로 인해 그가 디자인한 포드 차에서는 독일 스타일이 많이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p>
<p>그의 대표작으로는 아우디의 컨셉트카 아부스, 폴크스바겐의 뉴비틀이 꼽힌다. </p>
<p>2002년에는 하버드 디자인 스쿨에서 선정한 &#8216;올해의 디자이너&#8217;에 뽑히기도 했다. </p>
<p>지난해에는 역동적인 선이 특징인 포드의 대형차 토러스 디자인을 맡아 관심을 모았다.</p>
<hr />
<p>테크닉 보다 열정이 중요하다&#8230;&#160; <br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산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비로소 시야가 열리고 산이 보인다.    <br />제이 메이의 한 마디가 그렇게 느껴진다.&#160; <br />포드의 디자인 탑이라면, 얼마나 유수한 디자이너들을 겪었엤는가?&#160; <br />그러나 학벌과 테크닉 보다 열정과 사랑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게 없으면 다른 것들이 무용이라는 것이다.    <br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160; <br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면 성공이란 얼마나 꿈 같은 것이겠는가?&#160; <br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것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낫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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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또 옥합이 깨어졌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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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5 Jun 2010 17:54:16 +0000</pubDate>
		<dc:creator>makarios</dc:creator>
				<category><![CDATA[나의 신앙 나의 교회]]></category>
		<category><![CDATA[목양칼럼]]></category>
		<category><![CDATA[눈물]]></category>
		<category><![CDATA[선교]]></category>
		<category><![CDATA[옥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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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한국에서 한 자매에게 전화를 받았다.   맑은샘교회를 담임하던 시절에 결혼준비를 말씀으로 도왔던 자매이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는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다가 결국에는 이혼했으며 지금은 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    싱글맘이 되었지만 그녀는 용감했다. 신앙을 붙들고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src="http://tokyodream.org/zboard/revol_getimg.php?id=makarios05&amp;no=247&amp;num=0&amp;fc=edbc867729b982d9ff953365c9c572f5" /></p>
<p>한국에서 한 자매에게 전화를 받았다.   <br />맑은샘교회를 담임하던 시절에 결혼준비를 말씀으로 도왔던 자매이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는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다가 결국에는 이혼했으며 지금은 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    <br />싱글맘이 되었지만 그녀는 용감했다. 신앙을 붙들고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대견했다. 그 강한 생명력이야말로 모성(母性)이며 신앙(信仰)이라고 생각했다.    <br />그녀가 이번에 다시 나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평신도 선교사로 헌신한 것이다. 중국의 청소년 사역에 크게 기역하고 있는 열방학교에 무보수의 간호교사 겸 사무원으로 자원하여 출국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br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함께 기도하며 헤쳐 나왔기에, 이번에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격려와 기도 외에는 없었다. 파송이 된 이후에는 조금이라도 후원을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 사이에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p>
<blockquote><p>때로는 불행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 편안한 삶은 우리의 열정을 소진시키고, 안주하게 하여서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만드는 때가 많다.     <br />그러나 불행은 살고 싶다는 갈망을 주고, 그 몸부림 속에서 치열하게 살다 보니 이전까지는 알지 못하던 인생의 보배들을 알게도 하고, 얻게도 한다.</p>
</blockquote>
<p>한 여인이 자기 인생에 닥친 불행과 싸우기 위해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마치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과 같다. 그녀는 성경에 ‘죄 많은 여인’이라고 기록되었다. 그녀의 인생이 순탄하지 못했음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힘겨운 인생과 싸워 왔던 여인이기에 그녀는 예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받을 수 있었다.   <br />삼 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통째로 붓고 옥합을 깨뜨리는 이 감동적인 헌신은 평범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행동이다. 너무도 외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이토록 절실했던 것이다.    <br />나는 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쓰시기 전에 먼저 상처를 허락하신다는 것을.    <br />그 상처들은 우리를 가난하게 한다. 주님 밖에 없다고 소름 돋는 고백을 하게 한다. 말이 아니라 흐느낌으로 주님과 대화하게 하고, 몸 밖에 드릴 것 없으니 이 몸뚱아리라도 받아달라고 헌신하게 한다.    <br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까? 유치원생의 아들을 데리고 중국의 선교사로 헌신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아팠을까? 결국 그녀의 옥합은 눈물을 견디지 못하고 깨어졌다.    <br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쓸데 없는 행동을 나무라고, 핍박할 것이다.    <br />과연 그럴까? 이제 주님의 판단이 남았다.    <br />당신도 그녀가 낭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쓸데 없는 일을 했다고 하시겠습니까?</p>
<p>(눅 7:50)   <br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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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수님을 따르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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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5 Jun 2010 17:50:15 +0000</pubDate>
		<dc:creator>makarios</dc:creator>
				<category><![CDATA[나의 강단]]></category>
		<category><![CDATA[나의 신앙 나의 교회]]></category>
		<category><![CDATA[거듭남]]></category>
		<category><![CDATA[따르다]]></category>
		<category><![CDATA[믿음]]></category>
		<category><![CDATA[제자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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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60;
마태복음 8:19~22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160;</p>
<p>마태복음 8:19~22</p>
<blockquote><p>(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br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br />(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br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p>
</blockquote>
<p>기독교 신앙은 거듭남에서 시작합니다.</p>
<p>요즘의 교회들은 교육을 중시하는데, 그러나 교육이 가지는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풀이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세밀하게 설명한다고 하여서 믿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p>
<p>우리가 흔히 아는 것으로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p>
<p>물론 세상의 지식으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관한 지식으로도 역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p>
<p>요한복음 4장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이었던 산헤드린회의의 멤버였습니다. 그는 나이도 많았습니다. </p>
<p>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의 눈을 피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p>
<p>보십시오. 니고데모는 성경을 어려서부터 배웠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달리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로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성경의 대부분을 암송하고, 해석하며, 설교할 수 있는 훌륭한 지식인이었습니다.</p>
<p>그러나 그의 지식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천국에 가는 확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p>
<p>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p>
<p>“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p>
<p>그렇습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아는 것으로 천국 못 갑니다. 여기에는 성경도 포함됩니다. </p>
<p>우리가 성경을 알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어야 천국에 갑니다.</p>
<p>그런데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면 절대로 성경이 믿어지지 않습니다.</p>
<p>오늘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성경을 믿는가? </p>
<p>성경을 죽은 경전으로 보지 않고, 내 인생의 구체적 대답으로, 나의 인생에 가이드로,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삼고 있는가? </p>
<p>만약 성경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거듭남에 대하여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p>
<p>언제, 어디서, 어떻게 거듭났는가에 대하여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영리를 듣고, 동의한 것이 거듭난 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p>
<p>사영리가 부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형식이 곧 거듭남은 아니라는 말입니다.</p>
<p>하지만 하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나기 이전과 거듭난 이후가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p>
<p>마태복음의 저자는 마태입니다.</p>
<p>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세관 앞에 앉아있던 그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의하여 마태의 인생은 변했습니다.</p>
<p>많은 사람들이 마태복음을 ‘왕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p>
<p>그러나 동시에 마태복음은 ‘제자도의 복음’입니다.</p>
<p>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을 묘사하는 처음 이후에 계속해서 부르심과 제자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대미(大尾)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장엄한 제자도의 명령으로 끝이 납니다.</p>
<p>우리는 이러한 마태의 서술을 통하여 그가 왜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p>
<p>세관에 앉아 있었던 마태가 왜 직업과 가족을 버리고 떠돌이 선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p>
<p>그에게 예수님은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지고 다가왔습니다. 그는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고, 그 결과 그의 인생은 그가 생각도 못했던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p>
<p>이것은 마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p>
<p>또한 역사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도 한결같이 간증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p>
<p>예수님을 알던 시절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의 인생은 변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었다. 예전에 즐기던 모든 일이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했고, 예전과는 다른 즐거움들이 내 영혼과 마음을 가득 채웠다…</p>
<p>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경험이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p>
<p>설교를 들어도 다른 나라의 말처럼 들립니까?</p>
<p>아멘으로 동의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계산과 반론의 생각들이 오히려 마음을 혼돈스럽게 합니까?</p>
<p>설교를 아무나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영적이 설교가 아닙니다.</p>
<p>설교는 육신의 말이 아니라 영혼의 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들을 수 있는 귀가 따로 있습니다. 듣고 순종하는 마음도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심하고, 노력하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셔서,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 거듭난 나를 만나야 합니다.</p>
<p>그래야 우리는 말씀대로 살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p>
<p>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도 역시 제자도에 대한 내용입니다.</p>
<p>먼저 19절에는 서기관이 나옵니다. 서기관은 성경의 필사와 설교를 맡았던 직분의 사람입니다. 당연히 유대교의 종교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지적 차원에서 머물렀던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신앙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p>
<p>그는 오늘의 우리 보다 열 배는 용감했습니다. 서기관이었던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 기득권, 보장된 생활, 그의 명예를 모두 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p>
<p>그러나 그는 말합니다.</p>
<p>“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p>
<p>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시면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향이 같으니 잠시 동행이 되자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p>
<p>그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지 자기도 따라 가겠다고 말합니다.</p>
<p>오늘 이런 고백으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p>
<p>축복은 좋사오나, 시련은 싫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부자가 되는 것은 원하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면 따를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공은 받겠지만, 실패는 사양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습니까?</p>
<p>이게 다 거듭나지 못한 육신의 한계입니다.</p>
<p>이런 신앙은 결코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p>
<p>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p>
<p>이 서기관이 따르게 될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마치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예고하신 것처럼, 젊어서는 스스로 허리띠를 하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해주는 허리띠를 하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다니게 될 것이라는 예고와 같습니다.</p>
<p>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여우 보다, 공중의 새 보다 더 궁핍할 수 있습니다. 더 결핍된 환경에 놓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인자, 곧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p>
<p>머리 둘 곳 없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거기 계실 때에, 우리도 거기 있기로 작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자도의 따름인 것입니다.</p>
<p>또 21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가 하나 예수님께 나와 청했습니다.</p>
<p>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잠시 가서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 다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p>
<p>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로 단호하셨습니다.</p>
<p>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p>
<p>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식 노릇, 가족으로서의 의무, 인간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꿋꿋하게 주님만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자도의 따름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p>
<p>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p>
<p>그래야 성경도 믿고,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천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p>
<p>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p>
<p>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이미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 아닙니까?</p>
<p>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p>
<p>예수님의 육신은 재림을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그분의 영은 성령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성경의 말씀으로, 이 설교를 통해 우리 곁에 임재하십니다.</p>
<p>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만나고도 그분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p>
<p>이를 테면 이런 것입니다. </p>
<p>“나는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말합니다.</p>
<p>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나는 머리 둘 곳 조차 없단다. 그래도 괜찮겠니?” 물으십니다.</p>
<p>여러분이 표정을 바꾸면서 말합니다. “정말이예요?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야 하겠어요.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런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p>
<p>“…”</p>
<p>또는 이런 것입니다.</p>
<p>“저, 예수님. 이번 주일에는 주일을 지키지 못하겠습니다. 친구가 돌잔치를 하거든요.”</p>
<p>“그거 유감이구나. 하지만 네가 나의 제자라는 것을 그 친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네가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그래야 그 친구도 나를 만날 기회가 있지 않겠니?”</p>
<p>“글쎄요… 저는 그런 식으로 꽉 막힌 사람이 되기는 싫은데요. 예수님도 중요하지만, 친구관계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신앙생활 하는 편이 아닌가요?”</p>
<p>“…”</p>
<p>이렇게 하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p>
<p>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p>
<p>컵을 비우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과 야망을 버리고, 내 뜻을 비워야만 비로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p>
<p>예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p>
<p>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다면, 그는 가장 귀한 예수님을 얻고 또한 그가 포기한 것들을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p>
<p>당신은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까?</p>
<p>그렇다면 당신이 지금 예수님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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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첫사랑을 찾으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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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4 Jun 2010 04:09:08 +0000</pubDate>
		<dc:creator>makarios</dc:creator>
				<category><![CDATA[나의 강단]]></category>
		<category><![CDATA[나의 신앙 나의 교회]]></category>
		<category><![CDATA[계시록]]></category>
		<category><![CDATA[교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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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에베소]]></category>
		<category><![CDATA[회개]]></category>
		<category><![CDATA[회복]]></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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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계 2:1~7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또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계 2:1~7</p>
<blockquote><p>(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br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br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br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br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br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br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p>
</blockquote>
<p>&#160;</p>
<p>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묵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묵시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 관심에 비하여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교회 안에서 매우 희귀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p>
<p>이러한 폐단은 요한계시록의 본래적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만 성경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분석하려는 태도 때문에 생겨납니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1세기의 교인들에게는 요한계시록이 이상한 책도 아니며, 더군다나 어려운 책도 아니었습니다.</p>
<p>요한계시록은 핍박 가운데 있는 교회에 용기를 주고, 궁극적인 승리를 바라보게 하기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경계해야 할 일들과 다양한 시대적 징조들을 이해하도록 돕고 있습니다.</p>
<p>그런데 이러한 본래의 목적은 도외시하고, 구체적인 이름과 사건, 혹은 현상을 요한계시록의 어떤 내용과 연관하여 확정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요한계시록을 마치 점술가나 몽상가의 책처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p>
<p>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경계하고, 요한계시록이 그 본래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 방법은 선입관을 버리고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다른 성경들과 연결되는 교훈들을 찾아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p>
<p>그럴 때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이 책을 통해 말씀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p>
<p>먼저 오늘, 본문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p>
<p>1장의 내용이 요한에게 묵시가 주어지는 사건을 다루는데, 그와 함께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관심과 통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물론 당시에 실존했던 교회들입니다. </p>
<p>그러나 그것을 개별적인 교회로 이해하는 것은 부족합니다.</p>
<p>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많은 단어들, 특히 숫자들은 유대인이 전통적으로 가져왔던 상징적 의미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p>
<p>이를 테면 숫자 3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로 신성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숫자 7은 세상의 완성을 의미하며, 동시에 안식일을 의미하기 때문에 완전과 충만을 함께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숫자 12는 12지파와 12사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고, 숫자 1000은 무수히 많은 수, 혹은 충분한 수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됩니다.</p>
<p>그렇기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일곱 교회 역시 교회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p>
<p>결국 하나님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하여 현실에 존재하는 일곱 유형의 교회를 분류하시고, 각 교회에 맞는 교훈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일곱 교회 안에는 우리 교회의 모습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불어, 우리 교회에 하시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p>
<p>먼저 오늘 살펴볼 교회는 에베소교회입니다.</p>
<p>에베소는 바울이 애정을 가지고 목회했던 교회이며, 선교에 있어 큰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입니다. </p>
<p>에베소에는 역사적으로 아데미여신의 신전이 유명했는데, 순례자들이 이 신전을 보기 위하여 여행을 했고,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혹은 7대 건축물로 이름을 알렸던 곳입니다.</p>
<p>또한 에베소에는 은장색이 유명했는데, 이는 은 세공업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놀라운 기술로 아데미여신의 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서 기념품으로 팔았습니다. 이 세공품이 세계에 이름을 알리면서 그들은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은 대체적으로 넉넉했으며, 에베소의 시민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p>
<p>반대로 그래서 교회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에베소를 먹여 살리는 아데미여신이 있었고, 이 종교를 생업으로 이용하는 은장색이 있었기에, 다른 신을 부정하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하는 기독교는 에베소에서 환영 받을 수 없었습니다.</p>
<p>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피면, 실제로 바울의 일행은 이 에베소에서 봉변을 당하고, 선교를 도왔던 사람들이 매를 맞은 기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p>
<p>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p>
<p>바울이 에베소에서 선교하는 동안, 에베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고 말씀의 부흥이 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변화되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힘을 모아서 세계를 향하여 선교하는 모범적인 교회를 이루어 갔습니다.</p>
<p>오늘 본문에도 이 치열한 선교의 현장에서 수고했던 교인들을 향하여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p>
<p>(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p>
<p>(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p>
<p>우선 세 가지 점에서 칭찬이 있습니다. 첫째는 수고입니다. 이것은 게으르지 않다는 말씀과도 짝을 이룹니다. 부지런하게 일해 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내입니다. 이것은 ‘견디다’라는 말씀과 짝을 이루며 오랜 고초와 어려움을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분별력입니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이 교회를 시험할 때에 그것에 속지 않고 진실을 가려서 분별한 것입니다.</p>
<p>자칭 사도라고 일컬어진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종처럼 행세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하여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이런 지도자들을 교회가 겪으면 얼마나 많은 후유증을 앓게 되는지 모릅니다.</p>
<p>내가 낸 헌금이 그런 사람들의 밥이 된다는 것도 참기 힘든데, 심지어 그런 사람들이 사욕을 좇고 정치를 일삼고 죄를 짓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교회생활에 염증이 생기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p>
<p>속은 사람은 속은 사람대로 신앙에 치명상을 입고, 속지 않은 사람은 속지 않은 사람대로 마음의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상처를 받습니다.</p>
<p>그런데 에베소교회는 그런 ‘자칭 사도들’을 겪었습니다. </p>
<p>이 말을 복수로 사용한 것에 주목합시다. 이 말은 에베소교회에 이런 자들이 나타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라 여럿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p>
<p>왜 이런 사람들이 에베소교회를 노렸을까요? </p>
<p>답은 간단합니다. 부유한 지역의 제법 부유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먹이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그들은 에베소교회를 통해 물질적 후원을 누리려고 하였고, 이런 이유로 계속해서 교회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p>
<p>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어려움을 통해 분별력을 쌓아 갔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진정한 하나님의 종과 잘못된 삯군 목자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이성적 능력, 분별력의 지혜는 주님의 칭찬을 듣기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p>
<p>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p>
<p>(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p>
<p>(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p>
<p>주님은 칭찬과 함께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십니다. </p>
<p>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5절에는 이에 대하여 참고할 만한 구절이 보이는데, 그것은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권면입니다.</p>
<p>좀 더 쉽게 풀이하겠습니다. 의역을 피하고 본문의 어휘를 그대로 번역하면, ‘회개 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 하여라’입니다. </p>
<p>이 말씀을 통해 에베소교회의 교우들이 뭔가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p>
<p>그리고 그들의 행동에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그들의 사랑이 변했기 때문입니다.</p>
<p>주님은 이것이 회개해야 할 신앙적 퇴행이라고 말씀 하시면서,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p>
<p>촛대는 거룩한 성령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교회의 본질입니다.</p>
<p>사람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p>
<p>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에, 두 세 사람이 모여도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성령님의 임재가 없다면 거대한 예배당과 수많은 군중이 모여도 그것은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p>
<p>그런 점에서 이 경고는 매우 심각한 경고입니다. 그 만큼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교회의 상태를 주님께서 매우 심각하게 보시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p>
<p>에베소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p>
<p>한 때는 사도바울의 목양을 받으며 건강하게 성장하고, 세계의 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비전을 가졌던 교회였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굴복하지 않고, 수고와 인내로 교회를 지켜 왔습니다.</p>
<p>그러나 시대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에베소교회를 노렸습니다.</p>
<p>마치 약탈하는 강도들처럼 신자들을 영적으로 해치는 악한 자들을 겪으면서 교회는 예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신자들은 예민해졌습니다. 그리고 인색하게 변해 갔습니다.</p>
<p>풍성하던 헌신은 최소한의 것으로 줄어들고, 교회가 모든 것이었던 사람들이 교회를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p>
<p>이렇게 사역의 태도만 변한 것은 아닙니다. ‘자칭 사도들’은 모두 강단에서 교우들에게 말씀의 도리를 가르치고 복음의 진리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가르쳤던 것에 나름 꽤 괜찮은 내용도 있었을 것입니다.</p>
<p>그러나 복음은 본래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복음적 삶에 충실하지 않으면 복음은 거짓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고민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p>
<p>탁월한 내용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삶이 삐뚤어지면 자기를 변호하고,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말씀이 변질됩니다. 그리고 그런 변질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강단에 대한 경외심,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기대를 잃어갑니다.</p>
<p>교회에서 말씀이 메마르게 됩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p>
<p>찬양, 혹은 열렬한 기도, 친밀한 교제, 그 밖의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려는 노력입니다.</p>
<p>우습게도 이것은 뿌리를 자르고 입사귀를 땅에 박는 것과 같습니다.</p>
<p>교회가 찬양의 감동을 가지고, 열렬히 기도하며, 성도간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감화력을 발휘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생명력을 책임지는 근간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살아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p>
<p>결국 신자들은 주일이면 예배당을 찾고, 모임마다 기도와 찬양을 드리며, 똑같이 서로 사귐의 교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사라졌습니다.</p>
<p>때문에 하루 종일을 함께 하고서도 깊이 교제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없고, 예배를 거듭 드리고서도 충만한 감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p>
<p>주님은 이런 신앙생활을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진단하신 것입니다.</p>
<p>돌이켜보면, 그들에게도 열렬하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분명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p>
<p>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감사가 있었고, 더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친밀한 교제가 이어졌으며, 더 모진 핍박 가운데 있었지만 감사와 찬양이 멈추지 않았습니다.</p>
<p>과거를 기억하며 ‘좋았다’라고 회상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나름대로의 처음 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p>
<p>물론 이런 추억이 모두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신자가 정말 주님과의 충만한 교제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추억으로만 회상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p>
<p>그런 회상은 이미 그의 현실이 결코 좋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의 신앙과 삶이 후퇴하고 변질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오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p>
<p>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p>
<p>‘자칭 사도들’에 의하여 교회가 유린될 때에도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고, 모두가 실망과 상처로 인하여 떠날 때에도 교회에 남아 인내한 것만으로도 훌륭한 것이 아닌가? 누구라도 내 입장이라면 결코 나보다 더 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8230;</p>
<p>그러나 이런 생각은 합리화의 핑계일 뿐입니다.</p>
<p>오늘 본문의 1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p>
<p>(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p>
<p>일곱 별은 무엇입니까? 친절하게도 1장20절에 해설되어 있습니다.</p>
<p>일곱 별은 교회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리고 일곱 촛대는 에베소교회를 포함한 아시아의 일곱 교회입니다.</p>
<p>그래서 우리는 이 1절을 통하여 무엇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p>
<p>그것은 자칭 사도들의 문제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주님은 그 교회를 영적으로 지키기 위하여 신실한 종들을 보내시고 세우셨다는 것입니다.</p>
<p>에베소교회가 자칭 사도들을 분별하고 혹은 6절에서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건강한 신앙의 기준을 가졌다면, 그것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님의 신실한 종들을 통하여 에베소교회에 주셨던 은혜인 것입니다.</p>
<p>예수님은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하였습니다.</p>
<p>이것은 유대인으로 확정된 천국이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천국이 사망과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사역을 역동적으로 감당하는 모습을 함축하고 있기도 합니다.</p>
<p>다시 말하면, 교회는 평화의 자리가 아니라 영적 전장의 자리라는 것입니다.</p>
<p>주님께서 죄인들이 문턱 없이 교회에 들어오게 하시니까, 사탄도 자기의 특공대를 교회로 보내는 것에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p>
<p>때문에 교회는 이 땅에서 결코 완전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p>
<p>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안하거나 좌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p>
<p>온갖 풍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자리를 지키고 세워질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신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교회를 붙드시는 주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p>
<p>주님은 교회의 필요를 아시고, 교회를 사랑하시며, 교회를 위하여 가장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p>
<p>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만약 에베소교회가 버려진 교회라면 이 교회에 주님께서 이런 칭찬과 책망을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없는 것처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니, 우리는 책망 들을 때에 그 깊은 사랑을 이해하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p>
<p>그런 점에서 주님은 이번에도 에베소교회를 아끼시고 있습니다.</p>
<p>그들의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생활, 다른 사람과 환경을 탓하는 우매한 논리, 감동과 은혜를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회복시켜 다시 열정과 감사와 은혜를 찾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이 깊이 드러나고 있는 본문인 것입니다.</p>
<p>그렇습니다. 무너지고 병든 것,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은 남의 탓이 아닙니다. 환경 탓도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주님의 탓은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은 어려움의 고비마다 함께 계셨고, 은혜를 주셨으며, 인도하셨습니다.</p>
<p>다만 강퍅해진 나의 마음이 눈과 귀를 닫아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것뿐입니다.</p>
<p>그리고 그렇게 변한 원인에는 성장하지 못한 우리의 미숙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주변적인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허영과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p>
<p>주님이 함께하신다면 당연히 숫자는 늘어가야 하고, 형통해야 하고, 평안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 차서,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과 역경과 시험과 핍박을 주님 없음의 세월로 인식한 우리의 우매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p>
<p>이것이 바로 에베소교회에 회개를 요구하시는 이유입니다.</p>
<p>사랑하는 여러분,</p>
<p>고통보다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아십니까? 주님은 고통을 피하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에도 불구하고 강퍅해지거나 메마르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에, 세상이 주는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p>
<p>모든 그리스도인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p>
<p>이 말씀은 지속적으로 은혜 안에서 살아가라는 명령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은혜를 누리고 주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곁에 계시고, 손잡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핑계하지 말고 엎드려서 주님을 붙들라는 초대입니다.</p>
<p>여러분의 상처가 주님의 은혜 보다 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의 영혼과 신앙에 대하여 주님 앞에 책임감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p>
<p>주님의 임재 안에 갇혀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의 예배는 살아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열정과 눈물을 품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말씀이 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삶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까?</p>
<p>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아직도 그것을 남의 탓, 환경의 탓, 혹은 주님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하시겠습니까?</p>
<p>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것을,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했다는 것을, 우리 안에 세상을 사랑하고 누리려고 하는 욕망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p>
<p>알면서도 외면하고 싶고, 핑계하고 싶은 것뿐입니다.</p>
<p>그러나 이대로 고집하면 우리의 신앙은 고사(枯死)될 것입니다.</p>
<p>주님께서도 분명히 ‘촛대를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간판을 내리겠다는 뜻이며, 신자로서의 모든 은혜를 거두시겠다는 경고입니다.</p>
<p>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손 잡아 주시는 기회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멸망을 향하여 돌진하는 미련한 짐승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p>
<p>횃불에 반쯤 날개가 타버려서 바닥에 떨어져 신음하는 나방을 보셨습니까? 그래도 역시 다른 녀석이 뒤를 이어 나타나서 넋을 잃고 파멸의 춤을 추다가 결국에는 불에 타서 떨어집니다.</p>
<p>우리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p>
<p>교회는 생명입니다.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지켜야 합니다. </p>
<p>주님의 거룩한 임재가 교회 안에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각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신앙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칭찬도 하고 책망도 하십니다.</p>
<p>처음 사랑을 버린 사람들은 회개하십시오.</p>
<p>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낮아진 마음으로 돌아오십시오.</p>
<p>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p>
<p>이것이 에베소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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