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게로 오라!
마태복음 11:25~30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서 제자도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의 여러 고을로 흩어져 전도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선 이 말씀을 통해 한 가지 수정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강제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누구도 강제하지 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강제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사람의 믿음을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강제로 자기만 섬기도록 하셨다면 우리는 이렇게 많은 혼란을 겪고, 우상들에 둘러싸여 살아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을 지극하게 존중하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강제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누군가의 자유를 구속하고 강제로 믿게 한다면 그것은 결코 합당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압제’를 부정합니다.
근대의 세계사에서 기독교가 제국의 침략과 인권의 유린에 일조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국이 서부개척을 하면서 인디언들을 핍박할 때에,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릴 때에, 유럽의 열강들이 동남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할 때에, 기독교는 그것을 옹호하고 협력하였던 과거가 있습니다.
이유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미전도 지역을 미개지역으로 보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정복지로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역사로 인하여, 동남아에서는 아직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큰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반성하고, 그 토대 위에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가 복음을 누군가에게 강제하는 것이 매우 비효과적이며, 또한 많은 부조리들을 만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잘 되새겨서, 보다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인내를 바탕으로 하는 전도의 방법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전도의 거룩한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태복음 11장에서 다시 확인합니다. 무례하고 강제적인 전도의 방식들을 경계하더라도, 제자들은 계속해서 세상을 향하여 나가야 하며, 복음을 전해야 하고, 믿는 자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전도를 위하여 나름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고민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전도가 잘 되는 방식들, 혹은 이전의 경험에서 효과를 보았던 방식들을 따를 것인가?
그러나 어떤 방식들은 전혀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원리와 부합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결과만 중시한다면 보다 운신의 폭이 넓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결과만을 위해 달려가는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우기를 원하는 교회는, 무조건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의 원리가 바로 선 교회, 그래서 그 원리를 따라서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 인생을 걸고 실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들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패배감이 아니라 고민과 도전으로 다시 용감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포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속적으로 힘써야 하는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느슨해진 부분들, 복음을 전하는 것에 소극적이 되어버린 생각들을 다시 정리하고 열심을 새롭게 회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의 11장을 읽어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흩어져 전도했던 결과가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절에서 24절은 오히려 전도가 실패했던 도시와 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에서의 전도는 실패했습니다.
20절의 말씀에 의하면, 이 성들에서 오히려 더 많은 권능을 행하셨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불신앙은 극복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발길을 돌리셨고, 이제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불신앙과 결말에 대하여 탄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전도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하는 것이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과, 불신앙을 통해 복음을 거절하고 멸망에 이르는 것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선택입니다. 다만 그 기회를 바르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1차적 책임은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한 한국인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의 요청으로 한국의 선교단체에서 훈련된 청년들이 단기선교를 오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은 일본어 사영리 등을 준비하고, 간단하게라도 일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훈련을 열심히 받아서 이곳에 파송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니, 선교사님은 전도지 10만장을 준비하고, 그 지역의 모든 집들에 전도지를 넣어줄 것을 원했습니다. 청년들은 일단 현지의 선교사님에게 무조건 복종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에 묵묵히 그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무더운 일본의 여름날에 골목골목을 누비며 하루 종일 집집마다 빠지지 않고 전도지를 넣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교회로 돌아온 청년들은 반성회를 통해 불만을 가득 쏟아내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은 전도지(찌라시)를 돌리는 것 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붙들어서 사영리를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것이 아니냐고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선교사님에게 감히 말할 수 없어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억지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날에 전도지 10만장을 모두 돌리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선교사님은 털썩 강단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이곳의 10만명은 더 이상 내 책임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한 번이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저의 소원이었는데, 오늘 이 청년들을 통해 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10만명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해도 그 피 값을 저에게 찾으실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본에서 사역하며, 얼마나 선교사님의 마음에 복음을 전하는 부담감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의 기도를 들으며 청년들도 울기 시작했고, 같이 엎드려 하나님 앞에 일본의 선교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결과가 아닙니다.
물론 그 전도지 10만장이 사람이 보기에는 매우 불합리하고 비효과적인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그 본심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진심을 통해 불신앙의 땅에 하나님의 부흥이 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결과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전도할 때마다 충분한 결과를 얻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평가로는 예수님의 전도에도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미션완수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지만, 결과가 없다면 그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용감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한국에서 전도를 잘하시는 분으로 김기동 집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별명이 고구마 전도왕입니다. 이분은 전도를 고구마 찌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솥에 찜기를 넣고 물을 부어 고구마를 찝니다. 물이 끓어서 수증기가 뜨거워지면 고구마를 표면부터 익혀가게 됩니다. 그러나 단단한 고구마가 금새 익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익은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속은 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찔러보면 됩니다.
들어가다가 딱딱하게 걸리면 아직 익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젓가락은 쑤욱~ 들어가서 고구마를 관통하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잘 익은 것이니 꺼내 먹으면 됩니다.
전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안 오려는 사람을 강제로 오게 할 것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되도록 자주 교회 가자고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익혀 놓으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 저런 사정으로 인하여 고민하던 사람이 내 전도를 받는 순간 마음이 움직여서 교회에 나오게 되는데, 이런 전도는 하나도 억지스럽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솔직히 우리는 비겁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강제하거나, 무례하게 여겨지는 것이 싫다고 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은 범주 안에서도 얼마든지 전도할 기회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용기와 실천입니다.
우리는 때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이런저런 핑계들로 자신의 전도하지 않는 삶을 변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하려고 좀 더 자주, 좀 더 넓게 말하는 것을 노력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말입니다.
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도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25~30절을 보겠습니다.
11장의 말미에 있는 본문, 25절에서 30절을 지금까지 살폈던 문맥 속에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요절과는 다른 느낌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자기 삶에 지친 사람들이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때문에 이 말씀이 일상 속에서 지친 우리들에게 늘 위로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구나. 예수님은 회사 생활에 지치고, 가사노동에 지친 우리들에게 쉼을 주시고자 하시는구나. 나도 그런 쉼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요절을 읽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1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향한 교훈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전도의 실패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28절의 초청이 어떤 제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모두’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두 팔을 넓게 벌린 아버지처럼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26절~27절을 읽어 보십시오.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미 예수님은 이러한 초청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의 초청에 합당한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수고와 무거운 짐은, 삶의 무게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파송과 사역, 거절과 열매 없음으로 인한 상한 마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의 쉼과 안식까지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참 거북한 현실입니다. 교회와 함께 고난을 받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일은 거절하면서 마치 취미생활과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골라 하고, 그러면서도 육신적인 자신의 삶에서 오는 피곤함에 대하여 주님이 위로를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분별력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초청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위로입니다. 이 사실은 마지막 30절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멍에와 자신의 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과도 잘 조화를 이룹니다.
결국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의 짐을 같이 지려는 사람들이 이 위로를 받아야지,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 안간힘을 하던 사람들이 이 위로를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쉼이 있습니다.
그것은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변하는 것에서 생겨납니다.
온유와 겸손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울 때에,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평강과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옵니까?
느슨하고 쉽게 살아가는 삶에서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이런 내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 찾아가고, 수고하고, 거절 당하고, 상처 받아야 합니다.
신기한 것은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을 결코 깨어지도록 주님께서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시고 돌봐 주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위로와 쉼을 경험케 되기를 바랍니다.
좋습니다. 교회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백 번 양보해서 그런 것이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에 과연 다른 것들 것 얼마나 열정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성경을 사랑하십니까? 열렬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습니까? 여유가 생길 때마다 입술에서 찬양이 흐르고 있습니까?
이런 삶을 산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위로를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위로를 경험한다면,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고 자질구레한 일들까지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갈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자신의 삶을 자기 주장대로 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충성하고 있습니까?
그런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사역을 훼방하고, 당신의 복음과 꿈을 조롱하고, 당신에게 많은 상처를 만들어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에 기뻐하십시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로부터 호응과 칭찬을 들었던 시기는 역사 속에서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매를 맞고, 욕을 먹고, 옥에 갇히고,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런 사역자들을 배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죽고자 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와 친절을 빼앗을 수 없었으며, 모진 세월과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그들의 입술은 나지막하게 감사의 찬양을 불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 하십니다.
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져야 했던 사람들아, 다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의 마음에 온유와 겸손을 가르치고, 어떻게 하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를 알게 하리라. 나는 결코 억지로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나는 갈보리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결코 독해지거나, 악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도 어떻게 상황을 이기고 승리하는지 가르쳐줄 수 있다. 나는 너희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과 쉼이 충만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내가 그 일을 할 것이다……
이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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